가평의 추억(追憶)을 기억(記檍)하다 (Remember Memories)
1월
지금보다 개울과 하천은
두꺼운 얼음이 펼쳐지고 새벽이면 갈라지는 소리와
웅웅대는 소리가 난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강을 건넌 육중한 기차는 자라목에 들어서고
속도를 줄이거나 시간을 벌고자 서있다.
교량은 일제때 놓인것이며 견고하고 검푸르르하다
그들의 강제공사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고 자라목을 끊을 때 빨간피가 나왔다고 한다.
끊음으로 자라가 강으로 들지 못하고 죽어
고향은 戰爭의 풍파가 끊임없다고 풍수가는 이야기한다.
설밑이 되면 가평시장(加平市場)은
비단과 이불보와 털달린 점퍼를 팔고
되돌아 나올 때 신발집에 들른다
한해가 가기 전 외상값을 갚고 새옷을 사고
철다리아래 이화정육점에서 고기를 사고
한성이발관에서 머리를 자른다.
영화상회 앞에
고향의 정신적인 지주 석준아버지가 서 계시다
그분은 6.25 당시 학생(學生)의 신분으로 참전(參戰)했고
이화리. 복장리. 산유리 주민들이 배터께를 거쳐 장을 보고 갈라치면
크림빵과 우유를 허기진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분은 무인(武人)과 섬세한 정(情)을 겸비하였다.
2월
혹한이 서서히 물러가고 동산(東山)의 해가 조금씩 서둘러 뜬다.
부엌의 솥단지 김이 자욱하고 먼산의 안개사이로 검은까치가 난다.
마당마루에 상을 펴놓으면 연신 누나들이 상으로 찬을 나르고
문고리가 손에 쩍붙을 정도로 춥지만 땅에 파놓은 독에서 김치를 가져오면 그맛이 죽음이다
오후가 되면 둑에는 연한 아지랑이가 피고
톱을 사들고가는 아부지를 따라가는 친구는 뭐가 불만인지 입이 한발 나와있다
이발은 바짝깎아 엉성했고 새로산 점퍼가 부대자루처럼
커서 그런가 구종점근처 삼호상회에서 주인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대합실의 물이 끓는다
전근가고오는 사람들이 방을보러 다닌다.
선택의 기준은 출근거리이며 방의 온기와 시건장치 또는 주인집의 인상이었다
선생님, 군인가족, 공무원 등이며
사람으로 활력을 느끼며 떠남은 서운함이다 가는배웅은 역전까지이고
우리는 플렛폼에서 떠나는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손을 흔든다
3월
역전과 구종점 사이는 사람으로 분주하다
전파사와 문방구 그리고 사진관과 젓가랏 두드리는 집
개교하고 반편성을 끝내고
막걸리자전거 지나가고 동네이장 설문지 돌릴 때
갈고리 상의용사 돈내놓으라 소리지른다
지희네는 현재 남이오거리 주유소자리
아버지는 파월장교(派越將校)였고 어머니는 경북여고출신이며
집안을 건사하고 문방구를 운영하셨다.
집펌푸물이 자주말라 2차선 건너 민씨네서 흰바께쓰 두개로 연신물을 날랐다
수평에 엉성해 도착하면 1/2로 줄었지만
우체국다니던 민씨아저씨는 대머리에 인자함 100%였다
중고등학교 등교생들이 물결처럼 지나가고
지금의 남이오거리가 되기 전, 동그란산 다리가 생기기전
대파(垈派)건너 상가와 폐차장과 죽 하꼬방들이 있었다.
핫도그집과 오뎅집 (おでん屋)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
( 가평군청사. 1975 / 출처 : 국기록원 ) |
4월
장은 3일,8일이고 매해 서커스단이 왔다
장충체육관 규모의 천막을 치고
여관방에 장기투숙하며 공연도 하고 항아리도 돌리고
마약이 잔뜩 들어있는 '포룡액'도 팔았다
동네아저씨들은 담배를 피워댔고
애들은 가마니 바닥에 앉거나 쪼그려 공연을 본다
누런코가 연신나오고 마려운 소변을 참는다
밤마다 공연단장은 경찰과 마을유지들과 저녁을 먹고
어린공연팀은 시장에 가서 도루묵과 시금치를 사온다
우시장은 장날을 피해서 열린다
거래는 코스닥처럼 활황이었고
외국인 투자자처럼 춘천, 홍천, 서울 마장동, 마석에서
차로 많은 소가 입장했고
가평토착세력은 나름의 카르텔을 형성해 가격선을 지켜주었고
개미투자가 같은 농민들한테 혜택을 주었다
주막은 막걸리와 데운 정종 그리고 금복주가 있고 안주와 음식 100% 국내산이다
고기는 한우이고 천엽과 소간은 무한 서비스
새벽부터 먼거리 피로자를 위한 뒷방 으슥한 곳도 있었다
주모는 술을 권하고 소판돈이 두둑한 노인의 목소리는 높아진다
우리는 술집문가에 서서 혹시 돈이라도 줄까 또라지게
쳐다보던 완딸라~완딸라 였다
우시장(牛市場)이 파하면 저녁노을이 지고
인부들은 네모삽으로 똥을 치우고 모래를 뿌린다.
입구 백열등 아래 술집여인이 담배를 피울 때 한쪽으로 연신 치맛자락을 올린다.
당시 여관(旅館)과 여인숙이 많았고 금강여관. 이화여관. 가덕여관. 등 이었다.
오치성 국회의원은 금강여관에 묵었고
소개된 화전민은 집단으로 어느 여관에 묵었다.
잦은 공비(共匪)로 화전민(火田民)을 읍내로 이주시켰고 반의 학생이 늘고
아부지들은 무슨일이건 해야했다.
골목은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였고 리어카가 겨우 지나갈 좁은곳이 많았다.
도둑으로 병을 깨 박아놓거나 뾰죽한 철에 철사를 엮었다.
담에 두멍이 숭숭 뚫려있다.
학교가 파하면 친구네 들러 국수를 삶아 먹거나 볕든 마당에서 구슬치기를 했다.
원칙이 다틀려 결국 다털리고 집으로 오면 다신안가리 다짐하지만
며칠후 동네에이스를 데리고 갔다 탈탈털리다 (脫脫する)
科外는 학원아닌 가정집에서 한다.
경아 엄마네가 제일 규모가 크고 그분은 춘천여고를 나왔고
일일학습과 전과목을 가르치고 밥도 차려주었다.
5월
상춘객의 계절 가평시장(加平驛前)으로 사람들이 물밀듯 나온다
헬로는 리어카를 대놓고 짐흥정을 하는데 다실고 냅따 달린다
대파를 지나 길건너 철폐차장과 대장간을 지나 오목리다리로 내달리다
달전리(達田里) 입구에서 씩씩대며 쉰다
"돈 더안주면 안갈 거야"
뽀뽀할아버지 (キスの祖父)는 작고 한복을 입었다
국민학교 애들을 좋아해 웃으며 뽀뽀하자고 온다. 애들은 꺅~하며 도망가고
하드도 사주고 십원도 주고 공책도 주는 좋은 할아버지
안말은 용인이씨(龍仁李氏) 선산이 있는 명당이며 안자(安子) 들어가는 곳은
대체적으로 편안하단다
내시정승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동네애들은 산소에 올라
무인석(武人石)과 문인석(文人石)을 골대로하여 축구를 찬다
조선말까지 안말로 호랑이가 내려와 새벽에 올라가고
한번은 동네를 가로질러 강건너로 헤엄치며 새끼를 물고 갔다고 얼마있어 산불이 났다고
외부에 나와보니 고향소개하면
대성리~청평~발전소~안전유원지~산장유원지~남이섬~오아시스~용추~강촌을 모두 안다.
두들겨 맞기도하고 진달래개나리아래 사진도 간직하고
헬로도 알고 첫경험도하고 원조 머드팩소년 성철도 오아시스에서 보았단다.
비포장에 길가의 개나리와 산의 진달래는
먼지투성이였지만 꽃은 꽃으로 이뿌고 꽂히면 일단 걸어본다
영진의 집은 잘지은 강가 양옥이고 아부지는 한전에 다니셨고 아들만 둘 체형이 세임투세임
6월
녹음이 깊어지고 운동장 포플러나무가 우거지면
그늘도 넓어지고 골대는 높고 동네형들은 전술없이 공을 따라
간다 공은 희고 실밥이 조금 풀렸으며
전반의 시간은 그럭저럭지키나 후반전은 이길때까지 늘어진다.
구석에서는 대가리하나작은 애들이 찜뽕을 하고
공이 운동장으로 굴러오면 큰형들한테 개소리를 들었다.
노인둘이 나무의자에 앉아있고
철조망아래 민가의 숫소는 한참 발정해있다.
洞山아래서 짬밥먹는 軍人들을 구경하고 먹을걸주면
몇번 사양하다가 게걸스럽게 먹는다.
개울가서 함께 식기를 씻다가 군인아저씨 철모속에 고이 간직한
미국여자 나체사진을 보여줄 때 얼굴이 빨개진다.
모내기후 한달쯤
논의 물을 끊어 바짝 말리는걸 '물떼기'(water-splitting) 라고 한다.
어린모는 누렇게 죽어가고
바닥에 들러붙어 있지만 병충해에 강해지며 논물을 다시대면
청소년처럼 검푸르게 자라며 튼실해진다.
장(場)날은 흥청해지고
인천과 속초에서 올라온 생선과 건어물을
산나물과 버섯 그리고 약재와 바꾼다.
장은 사람들 구경이고 흔디낀 애와 정신줄 놓은 미친년
그리고 군복입은 동네양아치가 어슬렁거린다.
쌀집의 대형저울에는 쇠에 촘촘한 눈금이 있고
아저씨는 눈을 깜작거리며 무게를 잰다.
그리고 주판으로 두두려 돈을 환산해 주는데 농부는 서운한듯 서있다 간다.
사진관에는 군인과 노인영정사진
그리고 부유한집 가족사진이 전시되 있고
코니카사진 비키니가 이쁘다.
보조로 진학못한 동네형이 일을 거드는데 사진관주인 성격이
까탈스러워 눈물을 훔친다
밤에도 기온이 더워지고
동네평상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그앞에서 줄넘기와 훌라후프 또 말타기를 한다.
入鄕은 다양하고 산고생과살걱정을 하지만
밤은 깊어가고 하나둘씩 집으로 갈라치면
고스톱팀들은 어두운 집으로 들어간다.
|
( 가평교. 1975 / 출처 : 국가기록원 ) |
7월
방공호의 풀이 무성해지고
논가운데 미류나무 쭉쭉커 자기나라 미국을 바라볼때
잠자리 여럿날고 어떤노인 논물보러 삽을 메고 논둑을 걸어간다.
무당개구리 빨간배를 드러내며 물로 뛰어들고
거머리 볏줄기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물뱀 눈을 내밀고 조용히 S자를 그릴 때
일없는 몇몇은 다리아래서 솥에 뭘 끌이며 왁자지껄하다.
신작로로 경운기와 제무시가 지나가고
시골버스 대기소엔 말없는 사람 서넛이 쪼리려있다.
버스안내양은 시무룩하고
빵떡모자는 기우뚱하며 스톱오라이를 반복하며 문을 친다.
빗고개는 높지않지만 고갯마루이고
나무를 잔뜩실은 짐차는 가장자리로 서서히 오르며 검은연기를 낸다.
역전옆 에는 아람드리 목재와 바위 비료와 물건을 쌓아두었으며
동네사람들은 목재껍질을 벗겨 저녁밥 지을때 땐다.
육중한 기차소리와 경적에도 아랑곳없이 어린애는 씩씩대며
엄마젖을 먹었다.
역광장 옆에는 또 연탄공장이 있었는데
건달형제 셋이 질나쁜 석탄을 물에이겨 연탄을 찍어냈다.
쿵덕쿵덕하는 나름의 프레스기기도 있었고
빈민가에 비싸게 팔며 완력도 썼다.
무임승차자가 많고 속도가 멈추지않은 상태에서 뛰어내리다가
자빠지기도 했고 중학교마친 누나는 대처봉제공장에 다녔는데
역앞 가로등이 흐려져도 도착을 안한다.
먼친척 알듯말듯한 아저씨 부엌에서 밥짓는 어머니와
비료푸대를 깔고 앉아 이야기를 한다.
아부지 기일이고 어머니의 먼친척이고 밥은 손사레로 사양하고
날무를 식칼로 도려먹다 갔다.
무슨일인지 아부지 술한잔에 어머니와 언성이 있었고
모기장안에서 죽은듯이 누워있을때 윙 모기만 큰소리치고 날다
양재기 물한잔에 누운 아부지말씀 "사는게이렇게 힘든지 원~"
8월
덥고 습하며 늦장마가 길다.
고성리가 고향인 집주인할아버지는 집을 잘짓고 해체도 잘했다.
1899년 돼지띠로 풍수와 배짱과 약간의 사기와 뻥을 겸비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는 27세였는데 장대비가 삼일밤낮으로 내렸고
고성리에서 나뭇배로 목재를 실고 읍내에다 부릴때 순사놈이 힐끗보더니
이튿날 조사를 나왔을때 미리 작은나무로 밤새 바꿔치기를 해서 오히려 큰소리치었다는 말
"달밤에 나무를 보면 더 커이는 법이야 왜이래"
아부지어무니 근거지가 하색과 두밀 마장리와 북면인지라
장날이 되면 시골사람들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다.
짐도 맡기고 쪽잠도 자고
뒷간도 가고 밥도 먹었는데 주인할아버지 불평이 말이아니었다.
똥만 싸이고 먼지만 잔뜩 묻혀온다고
그래서 우리는 셋돈외에 공짜밥을 지어주었고 나는 막거리반되를 받아와 따라주었다.
물이불어 동그란산으로 꾸역꾸역 내려가면
우리는 물귀경을 뚝으로 간다.
심각하게 쳐다본다고 물이 멈추지 않겠지만
삼삼오오 동네별 연령별로 CGV영화보듯 한참을 구경하다 철다리로 기차들어오면 온다
올때 물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하고 애들은 굳이 웅덩이에 들어간다
길가 버드나무껍질은 검고
잎은 늘어지고 바닥의 빗물끼가 남아있는데 여자동창 나무뒤에 서있다
우산집과 매운탕집은 성수기이고 연탄집과 제재소는 손가락만 빤다
참전비 앞으로 알타리무와 쑥갓을 파는 할머니는 휜우산아래서 앉아있고 장사는 시쿤둥했다.
흙색슬리퍼는 잔돌이 자주끼었고
동창애 고추가루낀 이를 드러내며 웃고간다
9월
밤나무꽃 내음이 청소년을 자극하고 새로 부임한 여선생님의 마스게임이 모두를 자극한다
스피커소리는 사방이다
동네. 군부대. 읍사무소 그리고 학교 행진곡에 안내방송. 사이렌소리
정부발표. 그리고 애국가
가을은 모두가 분주해 아니 분주함으로 내몬다 논으로 밭으로 강건너로 운동장으로 뚝방으로
가족끼리 밥도 말없이 빠르게 먹고
선생님이 칠판에 적으면 받아쓰기하다 종이 울린다
질문에 질문할수 없고 앞문이 닫히면 도시락먹기 바쁘다
호미를 가져와 코스모스를 심고 저녁TV에 미국의 천문기상학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방송한다
우리는 여기에있고 우주는 코스모스 심은 길처럼 휘어 있다
돌아올때면 호미로 칼싸움을 하다 손가락을 쳐서
진짜 싸움을 하기도하고 누구는 군청앞 이쁜꽃을 호미로 파가다 걸리기도 했다
신발주머니에 신발은 없고
밤과 호두 가지와 파가 있기도하고
밤은 떯고 밤은 금방 찾아온다
파하면 읍내는 금방이나 먼데는 오래이다
시간은 동일하나 거리는 반비례하고 티비이야기에 없는애들은 침묵한다
나시찬의 전우를 보거나 고전유머극장으로 주말을 보내며
논과 밭에가서 작물을 가져오곤 했다.
|
( 가평우체국 1975 / 출처 : 국가기록원 ) |
10월
북방은 춥고 운전교육대 연습생들은 얼굴을 칭칭감았고 앉아있는 군인들은 덜덜떤다
지나가는 행인은 철지난 얇은옷에 떨고
경찰딱지위반에 동네장사꾼들 떤다
도루묵은 싸고 양이많아 가족용인데
지금은 비싸고 양이적어 고급일식집 접대용이다
그는 좋은시절에 태어나 대접받는 것이지 진귀하진 않았다
우리인생도 도루묵같아 말짱도루묵 같기도하고
속다가는 인생같기도하고 어느시기에 있는가에 따라
다른 대접을 받는것같다
그러나 속을 끓이건 그걸 끓이건 탈탈탈탈 소리가 나고 구수한건 같기도하다
가게는 주로 **상회이고
가겟문은 양철로 여럿만들었고 번호는 주인이 1. 2. 3. 5번을 쓰고 4번은 죽을사자라 제외했다
사람들은 동이틀때 가겟문을 열고 가게안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총채로 먼지를 털고
조리로 가게앞을 뿌리고 빗자루로 쓱쓱쓴다
행인에 인사를 건네고 앞집에 모닝인사를 한다
새마을과장은 지도차 자전거로 지나가고
푸른모자를 쓰고 있었다
흥철네 아리랑은 고향의 상징적인 존재이고
사진관, 이발관 그리고 예식장을 겸하는데
바로 옆은 전매소에 옥철아버지가 근무하셔서
두분은 약주를 자주 드셨다
울아부지도 가끔 동석했고 옥철아부지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군수는 관선이라 관사에 살았고
과장부인들이 관사일 이런저런것을 했고 유신사무관출신이나
중앙권력형이 많았다
공무원은 고되고 박봉이지만 급여가 정상날 나와
살림을 꾸려갈수 있었다
또한 공납금이 무료혜택도 있었지만, 시골로 갈수로 곡식을 팔지않으면 현금이 막막했다
어쩌면 학교발표력은
납부순서이며 평생성격일수 있겠다싶다
군민회날은 하늘이 맑고 높으며
만국기가 긴줄에 세모로 걸려있고 끊어지면 된소리가 난다
종목은 올림픽을 지향하지만 술한잔에 진행이 지양되고
그래도 빛바래사진만이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두명씩 헌병이 척척 순찰을 돌때 군인들은 쫄고 술취한 군민들은 읍내여기저기로 2차를 가다 가덕여관 골목에서 소변을 갈긴다
순흥상회 아저씨 선한 웃음을 지으며
자네들 적당하게 들게한다
공무원몇은 **옥에 들어가 젓가랏을 두드리다
호출전화로 다시 군청으로 복귀하며 외상을 긁는다
11월
휴전선을 통해 공비들이 넘어오거나
동해로 간첩선이 월경하다 침몰한다
둘을 잡거나 건져내서 취조하고 방송에 나올때면
장발에 초췌한 얼굴이며 사투리가 심하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삐라가 여기저기 흩날리고 삐라는 비나 눈에도 젖지않은 칼라고
김일성을 잘그려 눈썹이 짙고 미남형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것을 경찰서나 파출소 또는 민방위대에 갔다주면 공책과 연필을 주었다
수확한 논으로 가로질러 학교를 가고
웅덩이에 얼음이 거울처럼 얼때 마스크없이 호주머니에 손만 넣고 간다 돌아온 집은 을씨년스럽고 마루에는 양지가 사라지고
아무도없는 방은 군인담요속 밥한그릇만 수건에 쌓여있다
옆집동생 쓱보다 대답없이 그냥가고
방앗간집 복순엄마 구찌떡을 머리통만하게 갔다준다
그떡은 방아기계를 돌리다 스위치를 내리면
진행중인 공간에 남아있는것으로 쪄먹고 말려먹고 튀겨먹고 구워먹곤했다
아줌마 복순이 어디있어요 나도 걔어디있는지 통모르겠다웃는다
12월
피라미드처럼 보납산이 웅장하게 서있고
정상의 십자가 누가 뽑아갔는지 없다
군수로 음풍노월하던 한석봉은 양구로 쫒겨났지만
문방사구를 산에 숨겨놓았다는데 어려서 동네애들과 한참을 산을 헤메다가 바위에서 떨어지곤 했다
고창선운사의 부처님배꼽에 있는 비기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내용이 있다는 전설이 있듯이
보납산의 보물도 전설로 남았으면 한다
절산의 새벽불경은 녹음인것 같지만 병풍처럼 감싼 그산으로 강바람이 덜불어 다행이고
큰쇠망치로 개울돌을 쳐서 기절한 고기를 맨손으로 줍는
동네형들을 애들이 졸졸따른다
철기시대가 석기시대를 치면
그소리가 청동기시대처럼 은은히 멀리가고 산이나 철다리에 반사되어 울림으로 되돌아온다
뚝방의 겨울쑥과 갈대는 말라있고
제방의 돌을엮은 굵은철사는 춥게 버티고있는데
어느집상여가 코스를 시내로 잡아
이집저집 나와서 땡땡소리를 듣고 사람구경을 하는데
아 우리아부지 꽃상여타고 (一朶紅葩載而車)지나간다
날보더니 추운데 집으로 가라고 뭐라하는데 구경이 재미있어
사람틈에 숨어 끝까지 보고 집으로 돌아오니 인생이 한편의 꿈이고
아부지는 없고 아랫목에 빈밥그릇만 남아있었네.
|
( 가평경춘철교 1975 / 출처 : 국가기록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