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T한국뉴스타임] 서울시는 조선시대 영조(英祖)의 장손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의 무덤인 ‘의소묘(懿昭墓)’ 원당(願堂)에 대한 실체를 밝혀준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奉元寺 懿沼祭閣 扁額)>과 <봉원사 칠성각(奉元寺 七星閣)>을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2011년, <봉원사 칠성각>의 불단을 수리하면서 발견된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은 서울시의 문화재 지정조사 과정에서 ‘건식 탁본’과 ‘자외선 촬영’을 진행하여 정확한 각자(刻字)를 판독하였다.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된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은 사변형(四邊形)의 형태로, 가로와 세로선대(갓)에 봉이 달려 있는 구조이다. 각판(알판)의 글자는 인위적으로 끌을 이용해 깎아내었고, 바탕칠 또한 도구를 사용해 강하게 벗겨진 상태이다. 각자 분석 결과 ‘의소제각(懿昭祭閣)’ 4자(字)를 양각(陽刻)하였음이 확인되었다.
편액에 각자된 <의소제각>은 영조(英祖)의 장손이며 정조(正祖)의 동복형(同腹兄)인 의소세손의 명복을 축원(祝願)하기 위해 건립된 전각을 뜻한다.
『영조실록』 31년 11월 20일 기축 첫번째 기사에 ‘...지금 의소 묘(懿昭墓)의 원당(願堂)인 봉원사(奉元寺)의 위전(位田)을 본 고을에 망정(望定)하였다고 합니다...’라 하여 의소세손의 원당이 봉원사에 건립되어 있었음이 기록으로 전한다.
‘의소묘 원당’의 전각명으로 보이는 <의소제각>은 서대문 밖 안현(鞍峴)의 남쪽 기슭(현 서대문구 북아현동 중앙여자고등학교)에 만들어진 <의소묘>, 영조의 잠저인 경복궁 서편 창의궁 자리(현재 종로구 통의동 일대)에 세워졌던 <사당>과 별개로 영조가 봉원사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봉원사에 건립된 <의소제각>은 의소세손의 신위(神位)를 모신 “신당(神堂)”으로 불리었고, 지금의 <칠성각>은 1864년에 새로이 중건되면서 붙여진 전각명이다.
칠성각 상량기록의 서문인「봉원사중수신당서(奉元寺重修神堂序)? 에 따르면, “기존의 신당이 퇴락하여 새로이 중건하고 칠성각(七星閣)이라 편액 하였는데, … 때는 임금의 즉위 2년 갑자년 6월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칠성각은 1864년(갑자, 고종 1년)에 중건되었고, ‘칠성각’이라 편액을 건 ‘신당’임을 알 수 있다.
‘신당’이라는 전각명은 사찰에서 흔하지는 않은 것으로, ‘봉원사의 신당’은 불교의 존상 대신 유교식 신위를 봉안한 건축물을 지칭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봉원사의 신당’이『영조실록』에 기록 된 ‘의소세손의 원당’이자 <의소제각 편액>이 게시된 칠성각으로 파악된다.
<봉원사 칠성각>은 ‘조선왕실 원당’을 목적으로 건축된 내력과 관련 유물(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이 남아 있는 서울 · 경기지역 유일한 사례로서, ‘조선왕실 원당건축 연구’의 기준작이 됨으로써 그 가치가 높다.
봉원사 칠성각은 주불전인 대웅전의 북서쪽, 경사가 가파른 둔덕 에 자리하고 있다. 전면 3칸 5량가 맞배지붕의 소규모 전각으로, 측면과 후면에는 화방벽이 설치되어 있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공포는 2출목의 다포이며, 연봉 · 봉두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조선 후기 불전의 전형적인 의장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864년 작성된「봉원사중수신당서?에는 칠성각 중수를 ‘중구육영칠성지각(重構六楹七星之閣)’이라 표현하여 주목된다. 이는 ‘둥근 기둥 6개를 가진 칠성각을 거듭 세웠다’라는 의미로, 칠 성각 전면의 4개 기둥보다 더 많은 수를 기록하고 있다. 대개 벽 에 붙어 있는 기둥을 뜻하는 ‘주(柱)’는 기둥사이 공간을 의미하는 ‘간(間)’을 쓴다. 반면, ‘영(楹)’은 사당(祠堂)이나 정당(正堂)과 같 이 전퇴를 구성하여 예배대상 전면의 기둥이 모두 ‘楹’으로 구성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봉원사 칠성각>을 단순히 칠성각이라는 부속전각으로 전제해서 보면 전면의 다포(多包)는 상당히 격이 높은 건축물의 의장 수법이고, 규모 역시 4.5칸으로 일반적인 칠성각에 비해 큰 편이다. 건물의 평면에서도 소규모 건축물에 퇴칸을 앞쪽에 두어 전퇴(前退)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일반적인 유교식 사당의 평면 유형을 가져 차이를 가진다.
이러한 <봉원사 칠성각>의 건축적 요소와 관련 기록은 칠성각이 의소세손의 신위를 모신 ‘원당’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건립되었음을 재입증한다.
그런데 서울 · 경기지역에 건립된 200여 동(棟)의 조선왕실 원당 가운데 <편액>의 실물이 발견된 사례는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이 유일하다.
조선시대 왕실의 원찰(願刹)로 알려진 사찰과 그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지만, 원당으로 사용되었던 건축물이 확인된 사례는 보은 법주사 선희궁 원당, 의성 고운사 연수전, 송광사 성수전 뿐이다.
더욱이 서울 · 경기지역에서는 실제 원당으로 사용된 건축물이 지금까지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그나마 서울 흥천사의 경우, 기록을 통해 1846년(헌종 12, 병오)에 나라의 축원장소로 칠성각을 세운 사실이 전한다.
그러므로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의 발견은 ‘조선왕실 원당’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는 희소한 사례로 평가된다.
또한, <봉원사 칠성각>의 내부 ‘공간 구조’ 및 ‘장부 결구 흔적’을 통해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이 게시된 위치를 추정 가능하다.
사찰 불전 내부의 고주(高柱)는 불교의 실내의식 성행으로 고주를 불전 내부공간 뒤쪽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반면 <봉원사 칠성각> 같이 전퇴고주를 두는 것은 이러한 양상과 배치되는 특이한 모습이다.
무엇보다 <봉원사 칠성각> 내부에 설치된 고주의 측면에는 2개 이상의 목부재를 연결할 때 사용된 전통 건축기법인 장부짜임의 결구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장부짜임에 설치되었을 시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종의 성수전(聖壽殿) 원당이었던 <순천 송광사 관음전 궁판>과 <고운사 연수전 편액>을 통해 유추해 볼 때,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은 칠성각의 불단 전면에 감실 형태의 공간에 게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은 언제 훼손되었고, 왜 하필 <봉원사 칠성각> 불단 아래에 숨겨져 있었을까?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사찰의 조선왕실 원당이 폐쇄되었고, 관련 편액들이 모두 훼철되었다. 대표적인 사례인 ‘고종의 성수전(聖壽殿) 원당’이었던 <순천 송광사 관음전> 전패(殿牌)는 일제강점기에 강제 훼철되어 원형의 1/3이 훼손된 채 탁자로 개조되었다.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 또한, 그러한 시대적 상황과 궤를 같이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이 칠성각 불단 아래에 숨겨진 경위는 서울 진관사에 비장(秘藏)되었던 <진관사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국가 등록문화재 제458호)>의 사례가 참고된다.
지난 2009년, 서울 진관사 칠성각의 해체·보수과정에서 불단과 벽체 사이에서 <진관사 소장 태극기와 독립신문류(6종 21점)>가 발견되었다. 신문류의 발행일자가 1919년 6~12월 사이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동 자료는 3.1운동을 기점으로 어느 시기에 불단 내에 숨겨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진관사 또한 ‘칠성각의 불단’이라는 공간에 우리나라의 중요 문화재가 숨겨졌다는 점이다. 조선왕실과 관련된 유물인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과 3.1 독립운동과 관련한 문화재인 <진관사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는 분명 이를 <칠성각 불단>이라는 공간에 숨겨야만 하는 어떠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비록, 현재의 연구성과로는 <칠성각>이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을 불교에서 흡수하여 모신 공간으로 그 성격을 한정하지만, 봉원사와 진관사의 사례를 통해 볼 때 <칠성각>이라는 공간이 내포한 또 다른 상징적 의미와 역사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은 <봉원사 칠성각>이 조선왕실 원당이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 증거이자, 원당 건축물의 편액 중 현전하는 극히 희귀한 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뿐만 아니라, <봉원사 칠성각>은 서울 ? 경기지역에서 조선왕실 원당 건축물로 확인된 유일한 사례로서, 조선왕실 원당의 건립과 운영을 알 수 있으므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서울시는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과 <봉원사 칠성각>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체계적으로 보존 · 관리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화재 · 산사태 등과 같은 자연재해에 취약한 부동산 문화재에 대하여 실측, 사진촬영, 가상현실(VR) 등으로 기록을 남겨 보전하고 있다.
[보도자료출처: 서울특별시]